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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모 사
오늘은 우리 민족의 진정한 스승이셨던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서거하신 매우 애통한 날입니다.
75년 전, ‘바로 오늘’,
우리는 항일투쟁의 크나큰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독립투쟁이란 민족의 생존을 위해 가장 간고한 시기,
내내 선생님은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세계를 향해, 일본 제국침략자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승승장구하면
그와 반대로 선열들의 투쟁은 절망하고 허탈해 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시기에 일제에 투항했습니다.
그런 절망의 시간애도 선생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잃지 않도록
행동으로 길잡이가 되어 주셨습니다.
한 평생 오로지 강도 일본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일신의 안일과 행복을 포기하고,
삶, 그 자체를 투쟁으로 일관하신 선생님 아닙니까?
일생을 민족의 자주독립과 문화한국을 지향 하고자
싸워 오신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를 우리는 잃었다는
사실이 ‘한’으로 남은 지 75주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는 그 ‘한’의 진실을 보고 드리고자 합니다.
45년 민족이 해방되고 그해 10월
상해에서 저는 처음으로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저는 철없는 소년이었지만
우리 부모님과 환영대열에 나온 모든 동포들은
이제야 우리가 제대로 주인 되는 나라를
찾게 되었다고 환호했었습니다.
소년 이종찬은
그날의 그 환호성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제
위대한 지도자들의 힘으로 ‘임시’ 두자가 빠지고
대한민국 정부가 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순풍에 돛 단 듯이 번영하고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걸핏하면 중국 친구들이 놀려대든
지긋지긋한 ‘왕꼬누’란 소리…
상해 사투리로 망국노란 말입니다
그런 소리 듣지 않게 되었다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선생님도 희망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저도 부모님을 따라 상해 ‘광명’ 대극장에서
개최된 선생님의 귀국보고회 현장에 갔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우렁찬 목소리로
미국의 나사복(羅斯福)총통과
영국의 구길(球吉) 수상이
우리나라 독립을 약속했다는 말씀에
장내가 떠나갈듯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온 사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루즈벨트를 중국어식으로 나사복이라 했고
처칠수상을 구길이라 하여 모두 웃었던 것입니다.
당시는 워싱턴을 화성돈(華盛頓)이라 했고
모스크바를 막사과(莫斯科)로 불렀던 시기라
웃울 일도 아니지 않아요…
하여튼 모두 선생님의 말씀을
애교로 받아들여 웃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희망 속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귀국했습니다.
여러분 !
미국은 2차 대전 전후처리를 잘못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을 스스로 자기나라 행정도, 통치도
못하는 열등 민족처럼 평가했습니다.
왜적들이 우리민족을 비하하는 식민사관적 악선전이
연합국 여러 나라에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나라의 분단도 신탁통치도, 좌우대립도 이런 악선전을
옳은 말처럼 듣게 하고, 한국의 운명을 꼬이게 했습니다.
백범선생을 위시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런 악선전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나라답게 만드느라 동분서주했습니다.
그 과정은 독립운동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일제에게 36년간 점령당한 것도 분한 일인데,
나라를 찾아도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분할 통치된 나라가 되었으니
자주독립을 외쳐온 선생님의 심정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분단 없는 완전한 대한민국을 수립하시려든
선생님의 이상론과
분단된 지역에서나마 우선 정부부터 세우자는
현실론이 선생님을 괴롭혔습니다.
더욱이 현실론자들은 미국 군정과 결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련과 대결하는 반공이념을 구현한다는 구실로
일제 악질 경찰, 악질 특무를 그대로 기용했습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지켜 오신 선생님의
양심으론 이를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5·10선거 참여를 거부하셨습니다.
여러분 !
선생님은 대한민국을 거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영구분단 보다 통일 한국을 희망했을 뿐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도 영구분단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북측에 통일정부 수립을 제의해 보고
차근차근 추진하자는 명분론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강경한 극우세력은 현실론으로 무장하고
선생님의 이상론에 갈 길을 허용치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민족을 사랑하는 중도적 이상론은
친일세력과 야합한 강경 극우세력에 의하여
마치 친공(親共) 세력처럼 매도되었습니다.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수립 이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선생님 사이를 분열시키는 음모극이 은밀히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분열음모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70여년을 계속한 음모극이니 얼마나 심각합니까?
최근 상영된 다큐영화에서 소개된 ‘유어만’ 문서가
바로 이승만 대 김구 분열 음모극에 결정판입니다.
이후 일제 악질 고등계 경찰과 악질 특무 잔당들이
드디어 선생님에게 총격을 가하는 음모가
은밀히 추진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왜적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왜적이 기른 밀정, 하수인 손에 희생되었습니다.
우리가 통탄해 마지않는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어떻게 해방된 조국에서 왜적의 잔재들이 살아남아
감히 우리 선생님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이런 의문이 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니, 우리 민족 전체의 비극적 사실로 남아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현대사를 정의가 부정당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긴 역사로 볼 때,
역사는 반드시 정의의 편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
지난해 광복절 직전 후손들을 초청하는 오찬 모임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이승만대통령은 우파이고, 김구선생을
좌파라 갈라서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김구선생의 일생은 좌파와 인연이 멀고
민족주의로 일관하셨습니다”라 설파했습니다.
저도 윤석열 대통령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러분 !
오늘 백범 김구선생께서 불행하게 우리 곁을 떠나신지
75주년이 되었습니다.
75주년이 되었어도 선생님을 기리는 마음은
한 결 같이 우리들 가슴에 뭉클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마 역사는 정의의 편에 서있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가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비극적 서거로 남긴 ‘한’은 그때 가서야
풀리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근에 애국지사 장흥장군의 회고록 원고를 해외에 계신
그분의 아드님이 저에게 전해 왔습니다.
장 장군님은 백범선생 서거당시 현병사령관으로
그 직에서 파직되신 분입니다.
아마 장 장군이 중국에서 독립운동 한 경력이
당시 음모꾼들에게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한문이 많이 섞인 그분의 회고록을 저는 다시 윤문하여
출판하고자 작업 중입니다.
이런 작은 작업도 모두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정당한 동기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정당한 역사규명 사업은
우리 광복회가 계속할 것입니다.
선생님이시어!
75주년 추모일에 삼가 선생님의 영전에서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부디 영면 하옵소서
광복회장 이종찬 삼가 올립니다.
대한민국 105년 6월 26일
광복회장 이 종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