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독립운동가

12월의 독립운동가

패트릭 도슨/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어거스틴 스위니(1905 ~1989/(1907) ~1971/(1909) ~1980)

훈격 :애국장/애족장/애족서훈년도 :(1999)/ (1999)/ (1999)

1939년부터 중일전쟁 관련 허위보도 비판

1942년“육군형법 및 해군형법 위반 및 불경죄”로 징역 2년6월 선고

1939년부터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은 패전할 것이라고 폭로

1942년“육군형법 및 해군형법”위반으로 금고 2년 선고

1939년부터 일본군의 전황보도 허위 및 패망 주장

1942년“육군형법 및 해군형법”위반으로 금고 2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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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부터 중일전쟁 관련 허위보도 비판
1942년“육군형법 및 해군형법 위반 및 불경죄”로 징역 2년6월 선고

1939년부터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은 패전할 것이라고 폭로
1942년“육군형법 및 해군형법”위반으로 금고 2년 선고

1939년부터 일본군의 전황보도 허위 및 패망 주장
1942년“육군형법 및 해군형법”위반으로 금고 2년 선고

패트릭 도슨 /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 어거스틴 스위니

패트릭 도슨 , 1905 ~1989 , 애국장 (1999)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 (1907) ~1971 , 애족장 (1999)어거스틴 스위니 , (1909) ~1980 , 애족장 (1999)

1. 전시체제기 일제의 동원과 수탈

일제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의 고조와 세계경제공황에 의해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자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급격히 파쇼체제로 전환하고 침략전쟁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침략, 1932년 1월 상해침공, 1937년 7월 중일전쟁,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1945년 8월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인력과 물자의 동원·수탈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일상생활은 물론 정신신앙생활까지도 지배·통제하려 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도발 이후 일제는 전선의 확대와 전세의 악화에 따라 부족한 인력과 전쟁물자의 조달을 위하여 식민지 동원·수탈정책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이러한 전시체제하에서 경제적 자원수탈과 함께 최대의 희생을 강요하였던 것이 인력동원이었다. 그들은 전선의 확대에 따라 부족한 병력과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육군특별지원병령(1938.2), 국민징용령(1939.7), 학도 전시동원 체제 확립 요강(1943.6), 해군특별지원병령(1943.7),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1943.10) 등을 공포하고, 1944년 4월부터 징병령을 식민지 조선에도 확대 적용하여 수많은 인력을 강제로 동원했다. 급기야는 여자정신근무령(1944.8)까지 공포하여 여성인력을 동원하고, 전시물자 제조공장 노동자나 전선의 위안부로 전락시킴으로써 막대한 비인도적 희생을 강요했다.

일제는 1930년대 초부터 식민지 조선을 그들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려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특히 1937년 7월 중일전쟁 도발 이후에는 군수공업동원법까지 발동하여 모든 산업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게 하고, 식량은 물론 생활필수품까지도 배급제를 실시했다. 1939년 12월에는 제령으로 조선미곡배급조정령과 부령으로 미곡배급통제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기아적인 미곡공출을 강요했다. 각종 지하자원과 광물자원도 거의 전량을 수탈하여 전쟁물자 생산에 투입했고, 생산 목표량을 할당하여 증산을 독려했다. 뿐만 아니라 1941년 8월 금속회수령을 공포하여 철·동·청동·황동·동합금 등으로 제작된 모든 금속류를 공출하도록 하여, 유기(鍮器)·철기 등 금속 생활 집기 등을 강제 공출하고, 심지어는 사찰의 범종이나 교회의 종·철탑·울타리까지 수탈했다. 더욱이 기아적인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국방헌금’의 강제 징수·저축의 강요·‘애국채권’의 강매 등은 이러한 전시동원·수탈정책의 일환이었다.

2. 패트릭 도슨과 전시체제

패트릭 도슨은 1905년 8월 18일 아일랜드 도네갈(Donegal) 레터케니(Letterkenny)에서 태어났다. 유아기를 부모를 따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보냈고, 잉글랜드 런던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18년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은 후 1924년 아일랜드 시민권을 취득하였고, 아일랜드신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33년 10월 아일랜드 콜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934년 4월부터 제주읍 삼도리에 있는 천주교성당에 사제로 시무하면서 손신부(孫神父)로 불렸다. 1935년 2월 20일부터 전도표(全道彪)라는 한국어 이름을 사용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성콜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
한국에 도착한 성콜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

패트릭 도슨은 일제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보고,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였다. 당시 언론에는 일본군의 승승장구만을 보도했지만, 그는 이를 믿지 않고, 1939년 가을부터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일본 보도가 대부분 과장보도이거나 허위보도라고 알렸다. 예를 들면 1941년 4월경 목포 산정리 목포천주교 성당에서 열린 전남 천주교 선교사 집회에서“일본 신문에 의하면 일본군은 장사(長沙)까지 진격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으나 상해(上海)의 라디오에서 장사 전투에서 일본군의 패전을 보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 신문 보도는 허위이다.”라고 발언했다. 이 무렵 자신의 집에서 천주교 전도사 이응범(李應範)이 중일전쟁과 그 보도에 대해서 질문하자, “일본군이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는 것 같아도 물자가 부족하여 장기전에서 결국 패전할 것이다.”, “일본은 반드시 패배한다.”고 대답하였다. 1941년 10월경에도 천주교 신자 허봉학(許鳳鶴)이 중일전쟁 결과와 일·중, 미·영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자, “중일전쟁이 장기화 된다면 일본은 물자부족으로 패전한다.”, “최근 정세로는 미·일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일본은 물자 부족으로 패전한다.”고 대답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1941년 8월 자신의 집으로 놀러 온 초등학교 학생에게 “우리의 천주님은 천황보다 위대하다. 신무천황은 처를 두 사람이나 두고 있었다.”고 하고, 9월 14일에는 허봉학이 자신의 집에 걸어둔 ‘황실의 사진’을 설명할 때 야유하여 불경죄로 처벌받았다.

「제주도 신부들」, ≪경향잡지≫  40권 978호(1946.9.1.). 제주도에서 선교한 아일랜드 신부들이 겪은 고난이 생생이 담겨있다.
「제주도 신부들」, ≪경향잡지≫ 40권 978호(1946.9.1.). 제주도에서 선교한 아일랜드 신부들이 겪은 고난이 생생이 담겨있다.

패트릭 도슨은 1941년 12월경 유언비어 유포와 불경 혐의로 체포되어 1942년 5월 26일 기소되었고,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육군형법 및 해군형법위반, 불경죄’로 징역 2년 6월, ‘국방보호법, 군기보호법위반’으로 징역 2년 6월 도합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어 천주교 전주교구에서 사제로 시무하면서 1946년 5월부터 1959년 1월까지 한국독립당 국제외교행정특보위원을 역임했다. 1959년 5월 20일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스페인, 영국에서 가톨릭 사제로 봉직하였다. 1962년 6월 15일 아일랜드로 귀국하여, 1989년 2월 9일 더블린에서 별세했다.

3. 어거스틴 스위니와 전시체제

어거스틴 스위니는 1909년경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천주교를 신봉하여 1935년 아일랜드 성콜롬반신학교를 졸업하고 콜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목포천주교회에서 시무했다. 1936년 10월부터 제주도 서홍리 천주교성당에 사제로 시무하면서 서신부(徐神父)로 불렸다.

어거스틴 스위니는 1939년 2월 자신의 집에 온 천주교 신자 염군평(廉君平)에게 “일본군이 소주(蘇州)를 점령할 때에 많은 비전투요원을 살해하는 비인도적 행위를 자행했다.”고 폭로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도 중문리에 사는 주민에게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은 물자부족으로 패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1940년 4월 자신의 집에서 염군평과 대화 중“미국이 적극적으로 원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은 장기화된다. 장기화되면 일본의 승산은 없다.”고 발언했다. 1941년 2월경에도 염군평에게 “미영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장기화를 꾀하는 일본이 패전하는 것은 확정적이다.”라고 하여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을 확신하였다. 같은 해 4월경에도 영·일전쟁이 일어나면 소련 미국 등이 영국 측에 가담할 것이므로 결국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일본의 전황 보도는 전부 허위다.”라고 발언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금후 2년 이내에 일본군이 패망하는 것은 확실하다.”고 예언했다. 전시체제를 구축하고 전쟁협력을 독려하던 일제 당국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패트릭 도슨,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어거스틴 스위니 판결문(1942.10.24. 광주지방법원)
패트릭 도슨,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어거스틴 스위니 판결문(1942.10.24. 광주지방법원)

어거스틴 스위니는 1941년 12월경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체포되었고 1942년 5월 26일에 기소되어,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육군형법 및 해군형법위반’으로 금고(禁錮)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금고에서 풀려난 후에도 일제 당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는 연금 생활을 하다가 1945년 5월 29일 목포에 연금되어 있던 동료 아일랜드 신부들과 함께 강원도 홍천으로 옮겨 연금되었다. 그곳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후 아일랜드로 돌아가 그 사제 활동을 계속하다가 1980년 1월 19일 별세했다.

4. 토마스 라이언과 전시체제

토마스 라이언은 1907년경 아일랜드 메이요주 그로스 오모라이나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천주교를 신봉하여 신학교를 졸업한 후 신부로 서품되었다. 1933년 10월 아일랜드 콜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934년 4월부터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천주교성당에 사제로 시무하면서 나신부(羅神父)로 불렸다.

패트릭 도슨,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어거스틴 스위니 수형인명부(전라남도)
패트릭 도슨,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어거스틴 스위니 수형인명부(전라남도)

토마스 라이언은 1939년 봄,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자로 서귀포공립보통학교 촉탁교원을 거쳐 잡화상을 경영했다. 당시 경성일보·매일신보 제주분국을 맡고 있던 강붕해(姜鵬海)와 중일전쟁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일본의 신문에는 일본군만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부 허위이다. 금후 중국이 미·영의 원조를 받아서 사변이 장기화되면 일본은 패망한다.”고 말했다. 같은 해 여름에도 “지금 일본군이 중국의 중요 도시를 점령하고 있으나 결국 그것을 중국으로부터 완전 탈환하기 위해서는 전쟁은 장기화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패전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1940년 가을에도 서귀포 천주교회에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지금 일본이 승리하고 있어도 중국은 대국으로서 미·영의 원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최후에는 일본이 패전할 것이다. 결코 일본의 승리는 있을 수 없다.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일본은 궁지에 빠질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토마스 라이언은 1941년 12월경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체포되었고, 1942년 5월 26일 기소되어,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육군형법 및 해군형법위반’으로 금고(禁錮)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도 일제 당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다가 1945년 5월 29일 강원도 홍천으로 옮겨 연금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연금에서 풀려나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사제 활동을 계속하다가 1971년 11월 20일 영면했다.

5. 제주도 아일랜드 신부들 저항의 의의

1937년 7월 일제의 중일전쟁 도발 이후 1945년 8월까지 전시체제기는, 일제강점기 가운데서도 일제의 강제 동원과 수탈이 자행되던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더욱이 일제가 보도를 통제하고 그들의 승전만을 과장 보도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찾기 어려운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제주도 아일랜드 신부들의 일제의 패망에 대한 예언은 강제동원과 수탈에 시달리던 제주도의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주민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는 메시지였다. 일제는 이를 ‘유언비어’라 하여 처벌하였지만, 이들의 전세(戰勢) 판단과 예언은 적중했다. 이들의 메시지는 ‘유언비어’가 아니라 당시 정세와 전황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정확한 정세 파악에 의한 예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