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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독립운동가
박하균, 강달룡, 박내홍(6·10만세운동 100주년)
훈격 :서훈년도 :
박하균 , 1902 ~미상 , 애국장 (2020)
강달룡 , 1888 ~1940 , 애족장 (1990)
박내홍 , 1894 ~1928 , 애족장 (1995)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 오전 8시 창덕궁을 출발한 상여 행렬이 8시 30분경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직후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40여 명이 격문을 배포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6.10만세운동의 신호탄이었다.
6.10만세운동은 처음에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공산주의 진영과 천도교 구파계 민족주의 진영이 연합하여 준비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중국인 위조지폐범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6월 4일 이들이 인쇄한 대한독립당 명의의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하자’라고 적힌 격고문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6월 6일 천도교당과 개벽사에 숨겨 놓은 대량의 격문이 발각되었고,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권오설과 박내원 등 주요 지도부가 사전에 체포되면서 이들의 운동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한편, 학생들은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1926년 5월 3일 권오설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을 전달받은 연희전문학교 이병립은 박하균·이선호 등과 자체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들을 이른바 ‘사직동계’라고 한다. 또한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를 중심으로 이동환·박용규 등도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들을 이른바 ‘통동계’라고 한다. 이 학생들이 인산일 당일 상여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에서 시위를 주도했고, 현장에서 학생·청년들이 합세하면서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상여 행렬이 지나는 곳곳마다 일제 경찰과 무장 군인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종로 3가 단성사, 관수교, 황금정 3·4정목(현 을지로 3가·4가), 훈련원, 오간수교, 동대문부인병원, 창신동 채석장, 신설동 서울고무공사, 동묘 인근 등에서 10회 내외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학생들의 기습적인 시위에 당황한 일제는 현장에서 210여 명을 체포하며 강경하게 진압했고, 학생 일부는 기소되어 옥고를 치렀다. 서울 외에도 고창, 인천에서 수십 명의 청년이 시위를 전개했고, 전국 곳곳에서 봉도식을 열어 항일 의지를 표명했다.
6.10만세운동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정신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발현되었다. 아울러 민족협동전선 구축의 도화선으로 작용하여, 민족유일당운동을 촉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26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열린 ‘6.10만세운동 보고대회’에서 도산 안창호는 6.10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적 대혁명당 조직’을 천명하였다. 중국 관내와 만주 곳곳에서도 6.10만세운동의 영향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이 추진되어 독립군 단체의 통합이 촉진되었다. 이러한 연대 움직임은 1927년 2월 좌우 연합 단체인 ‘신간회’의 탄생으로 결실을 보았다.
홍원 3.1운동 주도
박하균은 1902년 함경남도 홍원군 보청면 신평리에서 태어났다. 박하구, 박하조라는 이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919년 17세가 되던 해, 학업을 위해 함흥으로 건너가 사립 영생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함흥지역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홍원군 보청면으로 귀향하여 이곳에서 다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을 직접 작성하여 1919년 4월 8일 보청면 장터 곳곳에 붙이며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같은 날, 그는 학생들과 함께 경찰관주재소와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 앞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이 일의 주동자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10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이 확정되었다.
상고 취의서에서 그는 “아무리 위협적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우리의 목적을 중지시킬 수 없다. 고통을 받는 만큼 우리 민족은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정의의 뜨거운 피가 솟구칠 것이다. (중략) 자유, 평등, 인애(仁愛)를 무시한 일본제국 정부여, 우리 민족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려면 먼저 자유와 평등사상을 유죄로 벌하라!”며 일갈했다. 어린 나이에도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재판에 임한 것이다. 1920년 3월 2일 출옥한 후에는 함흥기독청년회에 가입하여 방학 기간 함경도 각지를 돌며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6.10만세운동의 리더
박하균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9월 27일, 이병립 등 연희전문 학생을 중심으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조직되자 여기에 동참했다. 1926년 4월에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제1회 정기총회에서 편집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학생운동을 본격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5월 20일, 그의 하숙집에 연희전문 학생 4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과 가두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했다. 이 운동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5월 29일 서울 각 학교의 학생 대표들과 만나 실행을 논의하였고, 박하균은 그 자리에서 준비 책임자로 선출되어 학생층의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거사 일이 다가오자 6월 8일 이선호·이병립 등과 함께 서대문 밖 소나무 숲에서 태극기 30매를 제작했다. 9일에는 인산일에 배포할 격문 1만 매를 인쇄했다. 이 격문은 “2천만 동포들이여,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내용을 담아, 전 민족의 항일 의지를 촉구하였다. 박하균은 인쇄한 격문을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6월 10일 오전 8시, 창덕궁을 출발한 순종의 상여 행렬이 8시 30분경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나자, 이선호의 선창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어 상여 행렬의 끝이 관수교를 지날 무렵, 박하균은 이병립 등 연희전문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을 살포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일제 경찰과 기마대가 제지하며 학생들과 격렬히 충돌했으나, 박하균은 몸을 피해 현장에서 체포를 면했다.
그러나 박하균은 주동자로 지목되어 6월 22일 오후 체포되고 말았다. 1927년 3월 25일 경성복심법원 제3호 법정에서 열린 2심 공판에서 그는 “그날 만세를 부른 것은 양심이 가르치는 대로 한 것이다. 만세를 불러서 곧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나 우리의 괴로운 의사를 표시하여 자유를 얻자는 절규이었노라”라며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히 역설했다. 또한 재판장이 격문을 ‘불온문서’라고 칭하자 ‘조선독립문서’라고 맞받아치며, 삼엄한 재판장 안에서도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26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박하균과 함께 주도 인물인 이선호·이병립 등 11명은 이른바 ‘대정8년 제령 제7호’와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박하균을 제외한 10명은 5년간 형 집행유예를 받았다. 일제는 6.10만세운동에서 박하균의 역할을 가장 크게 보았던 것 같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박하균을 비롯한 10명에게 징역 1년이 확정되었고, 유면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선고 후 박하균은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7년 9월 20일 출옥했다.
그는 출옥 후에도 조선청년동맹과 홍원청년동맹에 참여해 활동을 이어갔다. 1931년부터는 서울 송현동에서 신흥서점을 운영하면서 공산주의 및 식민통치 비판 서적을 유통·배포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1932년 5월 다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이른바 ‘출판법’ 위반 혐의로,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 공동으로 안녕과 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고 한 자’라는 구실로 5월 3일 금고 5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또 한 번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0월 2일 출옥했으나, 이후의 행적과 후손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박하균은 남다른 리더십으로 어린 나이에 3.1운동을 이끌었다. 이어 학생들을 이끌며 좌절될 뻔한 6.10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1920년대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정부는 박하균의 공훈을 기리어 202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진주 3.1운동 주도
강달룡은 1888년 경상남도 진주부 진주면 비봉동(현 진주시 상봉동)에서 태어났다. 강달룡이라는 이름보다 강달영(姜達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황산’이라는 이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도 ‘강달영’으로 칭한다. 8살부터 17살 무렵까지 약 10년간 한학을 배웠고, 이후 경남도립낙육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했다. 그 뒤 대서업(代書業)에 종사하다가 1917년경 결혼했다.
1919년 3월 초,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한 후 독립선언서를 품고 3월 11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 후 함께 상경했던 김재화 등 지역의 지도자들과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3월 16일 비밀리에 격문 1,000여 매를 인쇄하고, 17일 저녁 진주면 대안동의 한 음식점에서 김재화 등 5명과 회합하여 격문을 배포했다.
3월 18일 정오, 마침내 진주면에서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강달영은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던 대안동에서 ‘조선독립선언서’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배포하며 시가행진을 주도했다. 이 만세운동은 3월 21일까지 4일간 지속되면서, 진주 시내 곳곳에서 농민·상인·학생·종교인·기생·걸인 등 남녀노소 각계각층 약 2만 8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경찰과 헌병,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진압했다. 그는 이 시위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이 확정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1921년 3월 8일 출옥했다.
노동자·농민과 함께한 대중투쟁
출옥 후 1921년 4월 23일 ‘진주청년회’에 참여해 상업부 사교(社交)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노동자·농민 단체를 조직하며 본격적인 대중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22년 2월 19일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진주노동공제회’로 불린 이 단체는 진주 내 10개 면에 출장소를 두고 8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대규모 조직이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1920년 4월 서울에서 조직된 것으로, 공장 직공·정미공·인쇄공·연초공을 비롯해 신문 배달부·인력거꾼·지게꾼 등 각계각층의 노동자가 참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 단체였다.
강달영은 진주노동공제회를 이끌며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1922년 9월, 진주청년회관에서 경남 서부지역 소작인 1천여 명이 참여한 ‘소작노동자대회’를 개최하여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또한 1922년 10월 16일 조직된 ‘조선노동연맹회’에 투신, 1923년 4월 27일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여 노동운동계에서도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이후 진주는 물론 중앙과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고, 그 결과 진주노동공제회 대표 자격으로 1924년 4월 17일 ‘조선노농총동맹’ 발기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직의 중앙위원으로서 서울과 진주를 오가면서도 강달영은 항상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적 약자의 곁에서 그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1923년 3월 11일, 그가 이끌던 진주노동공제회의 영향으로 ‘진주양화직공조합’이 결성되면서 진주 지역 최초의 직공 노조를 탄생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같은 해 5월 13일에는 백정의 해방운동 단체인 ‘형평사’의 창립축하식에 참석하여 600여 명의 대중 앞에서 축하 연설하며 연대를 표명했다. 1924년 11월에는 ‘진주 운수노동조합’의 동맹파업을 지원하여 노동자들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1924년 10월 23일에는 무산계급의 지식개발과 새로운 사상을 연구하는 동우사 결성을 배후에서 지원했으며, 이 일로 같은 해 11월 1일 진주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 시기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으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하고 국내외 정세를 파악했다.
한편,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지원하는 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늘어나자, 그 역시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공산주의를 수용했다. 1924년 10월 김재봉 등이 주도하는 ‘화요회’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 중앙총국인 ‘꼬르뷰로’ 국내부 진주 야체이카(세포조직)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황금정 1정목(현 을지로 1가) 아서원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진주지역 대의원 자격으로 대표 20명 중 1인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회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으나 같은 해 11월 신의주에서 공산당원이 친일 변호사를 구타한 ‘신의주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조사하던 일제 경찰에 의해 조선공산당의 실체가 발각되어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지도부인 김재봉 등 당원 30여 명이 체포되면서 조직은 큰 타격을 입었다.
민족협동전선으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은 1925년 12월 체포 직전, 강달영에 당 후계 조직의 재건을 맡겼다. 이에 따라 강달영은 1926년 3월 11일 서울 경운동 구연흠의 집에서 ‘제2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책임비서가 된 강달영은 사상과 이념을 떠나 범민족 연합전선을 통한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1926년 3월 10일 권동진의 집에서 천도교 구파 권동진·이종린, 기독교계 박동완, 언론인 안재홍·신석우 등 7명과 만나 비타협적 민족혁명단체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서거하자, 5월 들어 권오설·김철수 등과 그의 하숙집에 모여 인산일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이 운동의 실천을 위해 ‘6.10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책임자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을 선임했다. 권오설은 박내원을 통해 천도교와 연합하여 6.10만세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준비 과정에서 만세운동에 사용할 격고문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권오설 등 만세운동 지휘부가 체포되어 애초 계획은 좌절되었다. 일제 경찰은 이 일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연결시켜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비화하면서 130여 명의 관련자를 체포하였다.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인 강달영에게도 수배령이 내려졌다. 이를 피해 바나나 장수로 위장하여 조직 활동을 지속했으나, 1926년 7월 17일 저녁 무렵 서울 명치정(현 명동) 소재 주식거래소(경성주식현물취인소) 앞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곳에 운동 자금 270원을 맡겨 둔 사실을 알아낸 일제 경찰이 잠복해 있다가, 바나나 장수가 주식거래소로 들어가는 것을 수상히 여겨 돈을 찾아 나오는 강달영을 덮친 것이었다.
체포 후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암호 해독을 강요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뼈가 돌이 되어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다”라며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심지어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자살까지 시도하면서 끝까지 저항했다.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0년 9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33년 9월 16일 출옥했다.
그는 안타깝게도 고된 감옥 생활로 얻은 후유증인 정신질환을 이겨내지 못하고, 1940년 7월 12일 오전 2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남은 동지들에 의해 간소하게 치러졌다.
강달영은 늘 노동자와 농민 등 대중을 위한 투쟁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다. 그의 투쟁은 민족유일당운동의 모태가 된 6.10만세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1920년대 국내 독립운동 전선을 확대하여 민족총력항쟁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정부는 강달영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천도교 청년들을 민족운동으로
박내홍은 1894년, 충남 덕산군(현 예산군 덕산면)에서 박상호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호는 현파, 천도교 교인으로 받은 도호는 혜암이다. 당숙이자 천도교 4대 교주인 박인호의 양자로 입양되어 서울에서 자랐다.
집안의 영향으로 13세 때 천도교에 입교한 그는 정동학교와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20년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기도 했다.
1919년 9월 2일, 박내홍은 국내에서 문화계몽운동을 펼치기 위해 천도교 청년들을 규합하여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20년 4월 25일 ‘천도교청년회’로 확대 개편되어 천도교 내 범 청년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결성하였고, 1923년에는 이를 ‘천도교청년당’으로 확대 재결성하면서 당 본부위원과 상무위원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갔다.
1925년에는 천도교 내에서 최린 등 신파 세력이 일제와 타협적 노선을 걸으며 자치론을 주장하며 분열을 일으키자, 박내홍은 이에 반발하여 천도교청년당을 탈퇴하였다.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추구한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타협적 노선을 걷는 권동진 등 구파 세력에 합류하여, 구파의 전위 조직인 ‘천도교청년동맹’의 결성을 준비했다. 이때 규약기초위원과 전형위원으로 선임되어 동맹 결성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이윽고 1926년 4월 3일 천도교청년동맹이 결성되자, 이튿날 4일 개최된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대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천도교청년동맹은 전국 각지에 지부를 조직하여 타협적 자치운동을 배격하고, 비타협적 범민족운동을 전개하려 한 성격의 단체다. 박내홍은 이 단체의 대표위원으로서 천도교 청년들의 지도급 인사가 되어 그들을 민족운동의 길로 이끌어 나갔다.
6.10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조력
이 시기 순종이 승하하자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진영 간의 합작운동이 일어났다. 고려공산청년회와 천도교 구파가 손을 잡고 6.10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이다. 두 진영 사이에서 연락과 매개 역할을 맡은 인물은 박내홍의 삼종제(三從弟)인 8촌 동생 박내원이다. 그가 1926년 5월, 권오설을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한 직후 권동진·박내홍과 상의하면서 천도교계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내 양 진영의 합작이 추진될 수 있었다.
박내홍은 천도교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운영할 때 박내원과 함께했으며, 박내원 또한 박내홍을 후견인으로 따르며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6.10만세운동 추진 과정에서도 박내홍은 박내원의 배후에서 적극적으로 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자료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행적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1950년 6월 14일 《조선일보》에 실린 박내원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천도교측에 박내홍씨 등과 운동 내용을 설명한 후 6월 10일 인산 당일에 각도 교도들이 봉기하기로 약속하였다’라고 하여 박내홍이 만세운동에 깊숙이 간여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1926년 6월 19일《시대일보》기사에 「중대사건 관계인물」중 하나로 박내홍의 사진이 게재된 점은, 그가 6.10만세운동의 핵심 인물임을 증명한다.
즉, 박내홍은 격문 인쇄를 주도한 박내원을 도와 전국 각지의 천도교 교구 연락망을 가동하여 운동을 전국적 규모로 확산시키고, 격문을 각지에 배포할 준비를 하며 6.10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이자 천도교 교주인 박인호의 집에 격문에 사용한 도장을 숨긴 점에서도 박내홍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며칠 앞둔 6월 4일, 격고문이 우연히 일제 경찰에 발견되면서 좌우 연합의 만세운동은 난관을 맞았다. 일제 경찰이 권오설과 박내원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였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때 박내홍도 체포되었으나, 동지들이 끝까지 비밀을 지켜준 덕분에 일제 경찰은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6월 21일 무사히 석방되었다.
신간회 창립 주도
사상과 이념을 넘어 좌우합작으로 추진한 만세운동 계획은 불발되었으나, 학생 중심의 만세운동은 6월 10일 당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세차게 전개되었다. 이 6.10만세운동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의 민족통일전선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실로 1927년 2월 15일, 최초의 민족유일당인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천도교에서는 권동진이 주요 역할을 한 가운데, 박내홍 역시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규칙심사위원과 상무간사로 선임되어 핵심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27년 12월 10일 신간회 경성지회 제2차 정기대회에서 대표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1928년 2월 예정된 전체대회의 의결권까지 갖게 되었다. 신간회 운영의 미래를 짊어질 큰 축으로 기대받는 인물이 바로 박내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역량을 본격적으로 펼치기도 전인 1928년 10월 5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회 사무실에서 괴한의 칼부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을봉이라는 자가 20여 년간 천도교를 신봉하였던 아버지의 비석을 세워달라는 요청이 거부당하자 벌인 일이었다.
독립운동계로서는 신간회를 이끌어갈 큰 인물을 잃는 비통한 순간이었다. 신간회는 천도교청년동맹과 연합장으로 그의 영결식을 엄수하며 슬픔을 나누었다.
박내홍은 비록 짧은 생을 마감하여 별이 되었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천도교계 청년들을 민족운동의 현장으로 이끌며 6.10만세운동을 지원하였고, 신간회 창립이라는 값진 결실로 민족운동의 선두에 선 의미 있는 투쟁이었다.
정부는 박내홍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