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독립운동가

08월의 독립운동가

정미의병 '의병의 등불, 경술의 어둠을 밝히다.' (1907년 8월 1일 )

훈격 :서훈년도 :

정미의병(1907년)은 정미 7조약으로 인한 군대 해산과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발하여 전국적으로 봉기한 의병 항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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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1907년)은 정미 7조약으로 인한 군대 해산과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발하여 전국적으로 봉기한 의병 항쟁이다. 

1907년 대한제국은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 그리고 군대 해산이라는 치욕을 겪었다. 국권이 송두리째 흔들린 현실에 분노한 해산 군인과 민중은 전국 각지에서 봉기해 정미의병이라 불리는 대규모 항일전쟁을 전개했다.

정미의병은 이전 의병과 달리 전문성을 갖춘 군인들이 합류하며 전투력이 강화됐다. 농민·상인·유생 등 다양한 계층이 함께 하면서 규모도 급격히 커졌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의병은 13도창의군을 결성해 연합작전에 나섰고, 1908년에는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해 동대문 밖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전투 또한 치열했다. 

 

1908년 한 해에만 약 2천 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연인원 8만여 명이 참여했다. 1909년에도 1,700여 회 전투에 4만여 명이 싸우며 끈질긴 저항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본은 ‘남한 대토벌 작전’을 통해 의병 거점을 무자비하게 초토화했고, 국내 항쟁은 큰 타격을 입었다. 패배한 의병 중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재편되며 무장독립운동의 토대를 다졌다. 

 

원주진위대 봉기를 주도한 민긍호·김덕제, 서울진공작전을 이끈 이인영·허위 등 수많은 의병장이 각지에서 항일투쟁을 이끌다 순국했다. 정미의병은 단순한 봉기가 아니라, 전 민족이 힘을 모아 일제에 맞선 전면 항일전쟁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이후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이어져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광복의 뿌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