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찬(89) 광복회장은 ‘6.3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을 향해 이같이 경고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이젠 화합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이종찬 회장은 1981년부터 연달아 당선된 4선 국회의원 출신의 원로 정치인이다. 그는 원래 보수정당 출신으로 민정당 총무, 정무장관 등을 지냈으나 여야를 넘나들며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자주 대화하고 토론했다. 그는 “나도 다수당 원내대표를 해봤지만 한 번도 51% 이상 주장하지 않았다. 49%의 권한을 다 인정해줬다”며 서로 인정하지 않고 대립각만 세우고 있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적대적 인식의 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찾아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 때가 아닌가 싶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하나의 대립과 불신의 계기가 된 것 같다”고 짚었다. 이어 “지금 정국은 극단적 대립이 심화했다”며 “여야 모두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사회 전체가 적대적 분위기다. 대선 이후에는 세상이 나아지지 않겠느냐라는 전망도 있지만 불은 아직 안 꺼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부터 바뀌어야 한다”며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영국에서 만나 유사한 충고를 한 적이 있다. 당시에 깜짝 놀라더라. 그리고 당시 주창한 대중경제론이 시장원리로 많이 갔고 이후에는 신자유주의로까지 갔다. 이젠 크게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같은 철학은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꼽히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다음은 이종찬 광복회장과의 일문일답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광복 전 상황을 기억하나.
△어린 시절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보냈다. 일제강점기, 가족은 중국인들 사이에 숨어 살았다. 한번은 동네 꼬마와 다툼이 생겼는데 중국인이었던 그 아이의 엄마가 ‘망국노(亡國奴, 망한 나라의 노예)가 왜 우리 아이를 때리느냐’라고 하더라. 해방되니 이젠 ‘망국노’라는 소리를 안 듣게 됐다는 기쁨이 가장 컸다.
-할아버지 우당 이회영 선생은 대한민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꼽힌다. 6형제와 가족, 해방시킨 노비까지 약 60명을 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때 마련한 자금은 당시 돈으로 약 40만원이었다. 2015년 기준 명동 일대 공시지가로 환산하면 2조원이 넘는데.
△어린 시절, 집안은 늘 어수선했다.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웠는데 그땐 독립운동을 하는 줄은 몰랐다. 일본 영사관은 집 아래층에 히라가와(白川)라는 밀정을 세들게 해 가족의 동향을 감시했다. 해방되자마자 그 밀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린 나이였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주 당시에 우리 가족 60명과 이상용 선생 가족 40명 총 100명이 한꺼번에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柳河縣 三源浦 鄒家街)라는 추(鄒)씨 집성촌에 정착하기로 했더니 추씨 촌부가 자기네 터를 점령하러 왔다고 생각해서 우리 망명 가족을 받아주지 않아 정착하기까지 애를 먹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해당 지역의 토지를 사고 그곳에 독립군을 길러 내기 위한 학교인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3500명가량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학교 출신의 대표적인 활약이 ‘청산리 대첩’이다.
|
△(홍범도 장군) 흉상철거는 정말 잘못한 거다. 흉상은 데코레이션으로 만든 게 아니다.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은 육사의 전신으로 조선경비대(국방경비대) 계통을 강조했다. 거기에는 일본군 잔존세력이 주를 이루고 관동군 조금과 광복군 조금이 더해져 만든 단체다. 역사를 잘라버리고 일본군 잔재를 전통으로 삼으라고 하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체되는 날에 의병이 일어났다. 그 의병이 독립군이 됐다. 그 독립군이 광복군이 됐다. 나는 한 꼭지를 더 잇자는 거다. 국군의 모체가 이어지면 민족사적 전통성을 갖는 게 아닌가. 그래서 흉상을 만든 거다. 홍범도는 의병의 상징, 김좌진은 독립군의 상징, 지청천과 이범석은 광복군의 상징이다. 이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는 국군의 전통이다. 장식품을 없앤다는 것으로 난리 치는 게 아니다. 정신이 함몰되는 것이다. 나는 양보 못한다.
-육군사관학교(육사) 16기로 졸업해 육군 장교로 임관했는데.
△군에 엄청난 반인권적 기합이 많았다. 이것도 일본 군대의 잔재다. 미군의 기합은 토끼뜀이다. 이건 체력훈련의 일환이다. 일본군은 기합 주고 폭력을 가했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병영문화는 옛날 사무라이 시대 유품들이다. 이런 걸 우리 군대가 그대로 배웠다. 이걸 빨리 청산하지 않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엄까지 나오는 거다. 지금 육군사관학교가 있는 태릉은 일본군 지원병터였다. 땅에서 DNA가 나오는 것 같다. 이걸 청산해야 한다.
-독립운동가들을 이념의 잣대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좌우로 나뉘었다. 일부는 월북했지만 행세도 못하고 숙청당했다. 남쪽에서는 괄시하고 북에선 형장의 이슬이 됐다. 그분은 독립운동한 죄밖에 없다. 그 사람의 삶은 누가 보상해주나. 대표적인 예가 한지성씨다. 인도-버어마 전선에서 광복군 대장으로 싸운 독립투사다. 이분은 우파였는데 민족해방전선에서 민족정기를 살린다고 하니 혹시나 해서 북쪽으로 갔는데 빛도 못 보고 숙청당했다. 공산주의자도 아닌데 (후손들이) 쉬쉬하다 보니 역사에도 없고 시신도 없다. 분단된 조국에서 이렇게 대우받을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현재 짓고 있는 임시기념관에서 후손들이 모은 사료를 전시하고 있다. 국가에서는 이념을 들어 훈장은 못 준다고 하더라. 그러면 역사에서는 써주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분이 몇 분 있다.
-독립운동의 정의를 확장하자는 이야기인가.
△국내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고 노력해온 간송 전형필, 이런 사람도 독립운동가나 마찬가지다. 롯데그룹의 신격호도 독립운동을 한 거나 진배없다. 남들은 일본을 떠날 때 일본에 들어가서 돈을 벌었다. 차별을 다 이기고 대성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아무도 쳐주지 않는 건 아니지 않나. 이젠 생각을 자꾸 바꿔야 한다. 안중근 선생처럼 총을 쏴야만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지 않나. 거기에 한정되면 안 된다. 일본에 대항해 우리 것을 지키려고 한 움직임은 알아줘야 한다. 내가 자료를 자꾸 모으고 있다. 한글을 지키려는 사람, 우리 노래를 지키려는 사람, 무형적, 유형적 우리 가치 높이려는 사람도 독립운동 한 거나 진배없다. 캠페인을 해서 이런 것도 다 광복회에서 포용하려고 한다.
-시대 흐름에 맞는 말씀이다. 최근 일본에 가서 “광복회는 전쟁 전 일본에 대해 비난하고 규탄하나 그런 적개심을 전후 일본에까지 연장시킬 의사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향후의 한일관계는 어떻게 가야 할까.
△지금 일본 집권층에는 우파가 많다. 군국주의 시절 일본과 현재 일본을 혼돈하고 있다. 일본이 과거를 제대로 청산한다면 우리는 ‘톨레랑스(관용)’ 해야 한다.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는 요구하지 않고 용서하겠다는 입장이다. 한번은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야드바셈’에 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공간이다. 그 곳의 대문에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Forgive, Never Forget)’라는 문구를 보고 일본을 용서할 수 없는 내가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를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이 독일만큼 반성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독일은 빌리 브란트, 메르켈 등 지도자들이 반복적으로 사과했고 나치 언급 자체가 불법일 정도로 철저히 반성했다. 일본은 아직 그렇지 않다.
-광복 이후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오늘날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인) 조병옥과 장택상은 일본 고등계까지 가서 애국지사를 탄압했다. 이 범죄는 용서할 수 없다. 일본경찰보다 오히려 한국경찰이 더 지독하게 고문했다고 한다. 조선 검사는 자기 충성을 표시하기 위해 애국지사에게 3년형을 내릴 것을 5년형을 내리기도 했다. 광복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주의자 명단’은 800인이었다. 진짜 악질들만 골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4500명이나 된다. 그건 잘 못이다. 그 당시 방귀 좀 뀌는 사람들을 다 친일파라고 하면 우리가 일본을 다시 초청한 격이 된다. 친일파를 양산하는 건 잘못이다.
|
△내가 살날이 얼마 안 남으니 광복회를 정상화시키는 걸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고 뭔가 글을 남기고 싶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후손으로서 선생의 삶과 가치, 그리고 평등과 무소유의 이상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 우당 선생이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유, 그리고 그가 꿈꿨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봤다. 할아버지는 1920년에 임시정부에서 다녀오면서 임금을 다시 모시는 것을 나라를 다시 찾는 것으로 여겼던 생각이 깨졌다. 새 세상은 민주공화정, 이건 하나의 절차고 추구하는 가치는 평등, 공산주의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당시 소련을 다녀온 조성암 선생이 ‘소련엔 임금님이 없는데 더 지독한 당이라는 게 생겼다’고 하더라. 생각했던 게 허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고민이 이어지며 중국의 저항 문인 루쉰도 만나고 자유주의자들도 만났지만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이 와중에 일본에서 넘어온 청년 아나키스트들에게 심취했다. 아직 결론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이스라엘 키부츠를 가보고서 든 생각이 (할아버지는) 이런 걸 꿈꾸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소유. (할아버지에게) 이런 삶이 있었다고 소개하면서 내가 못하는 건 그게 가능할지 자신을 못해서다. 당시에 꿈꿨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은 거 같다.
-올해가 광복회 창설 60주년이다. 앞으로 광복회 어떻게 끌고 갈 계획인가.
△광복회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로 설립된 단체다. 독립운동가와 유족들에게 직접 보상금을 나눠주는 대신 그 자금을 기반으로 공동체적 이익을 추구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창립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 돈을 모두 나눠쓰면 끝이지만, 조금 더 고생하고 투자하면 이익이 나올 때 나눠주겠다”고 제안했고 실제로 포항제철·경부고속도로 등 국가기간산업에 투자해 발생한 이익금이 광복회 운영의 재원이 됐다. 이로 인해 회원들은 국가 세금이 아니라 이익금에서 지원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구조는 희미해졌고 현재는 국가 예산에서 직접 지원을 받는 방식으로 바뀌어 재향군인회와 유사한 형태가 됐다. 하지만 광복회는 본래 국가의 원로단체이자 자립적 공동체로 출발했다. 현재 생존해 있는 1세대 독립운동가는 극소수(5명 내외)이며, 2세대도 고령화하고 있다. 앞으로는 증손, 고손 등 후손 세대로 계승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국가에 부담을 주지 않는 자립적 광복회로 거듭나는 것이 목표다. 광복회는 앞으로도 독립운동 관련 학술·홍보 사업, 유적지 탐방 및 보전, 후손 장학사업, 친일재산 환수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민족정기 선양과 애국정신 함양에 힘쓸 예정이다.
-건강은 어떤가.
△이게 마지막 봉사라고 하니 신이 나더라. ‘이걸 귀찮게 왜 해?’ 이런 게 없다. 여긴 내가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곳이다. 내가 월급을 안 받는다. 어떤 사람은 국정원장하면서 벌어둔 게 많은가 보다 하는데 나는 지금 연금을 받는다. 350만원정도다. 우리 아버지가 독립운동했다고 해서 190만원가량 받는다. 합하면 500만원이 조금 넘는다. 국가로부터 받고 있는데 (광복회장) 페이를 또 받는 건 아니다 싶었다. 염치가 없는 거다. 이런 돈은 모아서 굉복회를 위해 쓰라고 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근본이 바로 서면 길이 저절로 열린다. 광복회에서도 이런 일을 하고 싶다.
■이종찬 광복회장 △1936년생 △육사 16기 △주영국대사관 참사관 △11~14대 국회의원 △김대중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초대 국가정보원장 △현 광복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