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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1혁명기념일을 맞아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장을 찾았습니다. 행사 내내 불편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을 상징하는 태극기 33개까지는 좋았습니다. 근데 기수단 33명이 든 태극기를 먼저 무대에 올려놓고 ‘민족대표 서른 세분’은 대통령이 올 때까지 3분을 침묵 속에 기다리게 하는 것은 의전의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입장해 행사는 시작되고 무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갈 때였습니다.
구구절절이 선열들은 오늘날의 역사왜곡을 짚어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학자(學者)는 강단(講壇)에서, 정치가(政治家)는 실제(實際)에서, 아(我) 조종세업(祖宗世業)을 식민지시(植民地視)하고, 아(我) 문화민족(文化民族)을 토매인우(土昧人遇)하여, 한갓 정복자(征服者)의 쾌(快)를 탐(貪)할 뿐이오…”
(일본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이 부분을 들을 때 저는 박이택 낙성대경제연구소장이 떠올려졌습니다.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보면서도 독립기념관 이사직을 내려놓지 않고 버티는 분말입니다. 낙성대 연구소 책임자인 박이택 소장은 일본의 강압적 통치기구였던 조선총독부의 통계숫자를 사회경제적으로 분석, 오늘날 대한민국 발전이 식민통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파고드는 사람입니다. 오늘 날 우리나라 발전이 기미독립선언에 나온 ‘우리 옛 왕조가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으로 보지않고 일본이 불법적으로 강점했던 식민지의 것이었다고 주창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박이택 소장은 학자로서 강단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민족인 우리를 야만족 같이 대우”하는 ‘신종밀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독립기념관 이사직에서 조용히 나오는 것이 사회적 갈등을 줄이며 기념관의 운영 정상화를 기하는 길입니다.
기미독립선언은 박이택 소장에게 계속해서 꾸짖습니다.
“…양국병합(兩國倂合)의 결과(結果)가, 필경(畢竟) 고식적(姑息的) 위압(威壓)과 차별적(差別的) 불평(不平)과 통계수자상(統計數字上) 허식(虛飾)의 하(下)에서 이해상반(利害相反)한 양(兩) 민족간(民族間)에 영원(永遠)히 화동(和同)할 수 업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巨益深造)하는 금래(今來) 실적(實績)을 관(觀)하라…”
(…두 나라 합방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회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박이택 소장이 연구하는 조선총독부 통계숫자가 얼마나 허위이고 위선적인가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통계는 기미독립선언에서처럼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이었고, ‘민족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숫자임’이 당시를 살고 있는 민족대표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통계’입니다. 이 통계를 갖고 의미를 주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식민지 시대의 영향을 받았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무대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읽어 내려갈 때 떠오르는 부분이 더 있었습니다. 권력이 뉴라이트에 둘러싸여 이승만 초대대통령을 우상화하고 공식정부의 수립을 건국으로 왜곡하는 부분 말입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제 마음 속에 이 부분에 대한 답을 보게했습니다.
“ …반 만년(半萬年) 역사(歷史)의 권위(權威)를 장(仗)하여 차(此)를 선언(宣言)함이며…”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유사이래(有史以來) 누천년(累千年)에 처음으로 이민족(異民族) 겸제(箝制)의 통고(痛苦)를 상(嘗)한지 금(今)에 십년(十年)을 과(過)한지라…”
(…역사가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라고 한 부분입니다.
상기 부분은 ‘건국전쟁’으로 이승만을 띄우고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주창하는 자들에게 반복해서 읽으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 (정확히는 3.1혁명이후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탄생)을 ‘건국’으로 억지를 부리는 뉴라이트들과 일부 권력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따라 준동하는 자들에게 선열들이 다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승만 정부의 탄생한 것을 ‘건국’이라고 하면,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불법적인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요, 일제시대가 더 좋았다는 부류들의 주장입니다. 김일성의 업적을 과도하게 포장, ‘조선인민사회주의공화국’을 건국했다는 ‘북한 따라하기’입니다.
일본의 강압적인 병합과 식민지배가 불법적이었기 때문에 나라는 소멸한 게 아닙니다. 건국은 일제시대의 불법강점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개념 없이 건국이라는 말은 써서 안되는 겁니다.
오늘 3.1절 기념식 축사에서 대통령은 ‘자유를 향한 위대한 여정’을 내세우며, ‘자유’를 무려 열 일곱번이나 외쳤습니다. 특정한 이름을 내세운 것은 아니지만 ‘이승만과 건국’을 화면상으로 또 언어로 심으려 했습니다. 이날은 독립기념일인데 갑자기 1954년 이승만의 미의회연설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위대한 여정’속에 사실 이승만이 어디 있었나 볼까요? 이승만은 없었습니다. 1919년 선열들이 차꼬를 차고 형틀에 있었을 때, 기미독립선언문이 세계만방에 울려 퍼지고 있었을 때, 이승만은 ‘자유를 위한 위대한 여정’에 있지 않았습니다. 3.1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호놀룰루 뉴욕을 오가며 여행했을 뿐입니다.
3.1운동 이틀 뒤인 3월3일. 이승만은 정한경의 제의에 따라 우리나라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은 후 독립하는 방안을 자신의 선생님, 윌슨 대통령에게 제안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통치안을 당시 국제연맹에 보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파리로 가는 비자도 받지 못했습니다. 미국 국무부 역시 한국 대표들의 참여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국제연맹에 실제 참석하여 비슷한 내용의 문건을 낸 사람은 이승만이 아닌 김규식이었습니다. 이승만을 국부로 신격화하려는 사람들이 이승만을 외교 독립운동가 운운하고 이날 대통령도 ‘외교 독립운동’을 강조하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외교 독립운동’의 실상은 안창호, 김규식 등과 같은 사람들과 공통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독립운동가들의 운동방식이 무장투쟁계열 뿐만 아니라 외교 교육 문화적으로 다양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면서 무장투쟁계열을 깍아 내려는 시도도 엿보이는 하루였는데요, 위에서 처럼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진정 ‘외교 독립운동’으로 실익이 있었는 지는 따로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기미독립선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오늘 대통령은 축사 말미에서 “저와 정부는 독립과 건국, 국가의 부흥에 이르기까지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후손들에게 올바르게 기억되도록 힘을 쏟겠다”고 했습니다. 이승만의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언젠가는 정부수립으로 수정될 것입니다. 우리 근대사의 왜곡이자, 나아가 일제시대 식민지배, 북한의 건국을 정당화시켜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건국 시기와 관련해 독립선언문은 ‘역사가 있는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일본)의 압제에 당한 지 10년이 지났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군 시기 우리는 이미 건국한 나라’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헌법도 그래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로 우리나라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부수립일이 ‘건국’이 아닌 것은 기미독립선언문의 날짜 표현을 보면 당장 알 수 있습니다. 독립선언문은 마지막 부분 선언 날짜를 쓰면서 ‘조선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년 삼월 초하루’고 특정하고 있는 것이 보이질 않습니까?
이승만도 독립운동가로서 평가를 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시류를 좇아 그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리고 그가 건국을 했다고 주장하면 할 수록 그것은 이승만 초대대통령을 더욱 사지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은 한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