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6.06.02

6·10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

운동의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의대주제로

광복회·()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공동주최

 

 

 

광복회(회장 이종찬)역사적인 6·10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여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회장 박찬승, 한양대 명예교수)와 함께 국가보훈부의 후원으로 오는 65() 10~18시까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의정원홀에서 ‘6·10만세운동 100주년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공동 개최한다.

 

이번 국제학술심포지엄의 대주제는 ‘6·10만세운동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의의로 기조 발표는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교수(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명 박노자)‘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라는 주제로 발표한다.

 

국제학술심포지엄은 3부로 나누어 제1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 26·10만세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이후, 3부 순종 장례 및 6·10만세운동의 보도와 평가 순으로 진행된다. 각 부 주제 발표가 끝난 뒤 발표자와 지정 토론자가 열띤 토론을 벌인다.

 

1부에서는 전명혁 교수(동국대)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청, 천도교 청년동맹의 6·10만세운동 준비’, 홍성표 교수(연세대)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학생층의 6·10만세운동 준비를 주제로 발표한다. 2부에서는 김경준 연구원(독립기념관)‘610일 서울 만세시위 전개과정’, 최은진 교수(한국외대)‘6·10만세운동기 지방 주민학생들의 동향’, 김정란(한양대 박사과정 수료)‘6·10만세 이후의 학생운동에 대해 발표한다. 3부는 김민석 교수(한양대)국내 및 국외 한인 언론에 비친 순종 장례와 6·10만세운동’, 미쓰이 다카시 도쿄대 교수가 순종 장례와 6·10만세운동에 대한 일본 정부와 언론의 반응’, 신주백 교수(전 연세대)‘6·10만세운동에 대한 평가의 변화란 주제로 발표한다.

 

이와관련, 국제학술심포지엄의 마무리는 박찬승 기념사업회 회장의 사회로 블라디미르 티흐노프·장석흥(국민대이준식(전 연세대) 교수 등이 참여하는 종합토론으로 진행된다. 이번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특히 주목되는 발표는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박노자), 홍성표, 최은진, 신주백 교수 등 4명의 주제발표다.

 

한편, 2026610일은 19266·10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6·10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 역사를 재정리하고 역사적 의의를 되짚어 보는 국제학술심포지엄이다. ()

 

 

붙임자료 1

6·10만세운동1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움 포스터

 

 

 

 

 

붙임자료 2

발표 예정 주요 논문의 내용

 

1.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교수(한국명 박노자, 오슬로대)의 기조 발표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본 논문은 6.10만세운동의 국내외적 배경,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연합을 정리한 뒤, 이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짚고 있다. 6.10만세운동을 전후하여 당시 조선공산당의 경우는 130명의 화요파 당원이 체포되는 등 커다란 타격을 받았지만, 화요파 대신에 서울파가 당에 대거 입당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또 재판과정에서 운동가들이 자기희생적인 옥중투쟁과 공판투쟁을 벌였으며, 당시 재판에 회부된 11명의 학생들도 역시 강경하게 맞섬으로써, 재판을 독립운동의 선전장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결국 학생들의 이러한 태도는 1920년대 후반 학생들을 고무시켜 학생운동 조직의 전국화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끝으로 이 논문은 6·10만세운동으로 당시 운동가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렀지만, 이 운동은 이후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을 고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결코 헛된 희생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2. 홍성표 교수(연세대 국학연구원)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학생층의 6·10만세운동 준비

 

본 논문은 6·10만세운동 과정에서의 학생층 동향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글이며, 6·10만세운동을 조선공산당 계열의 주도로만 보려는 경향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고 논쟁적인 글이다.

이 논문은 6·10만세운동을 누가 준비하였는가가 아니라 학생들은 어떻게 실제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가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한 글이다. 이를 위해 발표자는 판결문, 신문기사, 경찰 비밀문서, 학교 자료 등을 종합하여 학생들의 참여 양상과 관계망을 가능한 한 복원하였다. 그 결과 이 논문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조선공산당의 조직적 지도하에 형성된 단체라기보다, 중앙고보와 연희전문, 중동학교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생사회의 학연과 생활공간, 하숙집, 학생회 활동 등 기존 관계망 위에서 성장한 조직이었다.”고 본다. 또한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권오설·박래원 등의 격문 준비가 좌절된 이후에도 학교와 학생회, 하숙집과 기숙사, 선후배 관계와 학연으로 연결된 학생사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610일 실제 행동, 즉 만세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연구는 민족협동전선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는 사회주의자와 기독교인 등 서로 다른 이념과 배경이 존재했지만, 조선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와 상호 신뢰가 그 차이를 넘어설 수 있게 하였다. 즉 협동은 단순한 정치세력 간 연합이 아니라, 공동의 문제의식과 인간적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실천적 연대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연구는 6·10만세운동을 지도자와 조직 중심의 역사에서 학생들의 역사로 다시 읽고자 한다. 그동안 역사 서술의 중심에 충분히 위치하지 못했던 학생들의 이름과 관계망,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복원함으로써 6·10만세운동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6·10만세운동을 특정 조직이나 이념의 산물로 환원하기보다는 학생사회의 관계망과 신뢰, 그리고 독립에 대한 공감 속에서 형성된 집합행동으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아울러 발표자는 6·10만세운동의 범위를 보다 넓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6·10만세운동은 단순히 1926610일 서울 시내 학생들의 만세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종 서거 이후의 사회적 분위기와 송학선 의거,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의 준비, 학생들의 만세운동, 홍종현·천세봉 등의 의거, 26·10만세운동 준비 등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독립운동의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 최은진 교수(외국어대 사학과)“6·10만세운동기 지방의 주민·학생들의 동향

 

본 논문은 그동안 학계에서 소홀히 다루어 온 주제를 본격적으로 정리한 논문이다.

1926425일 순종 서거와 6·10만세운동을 전후하여 각 지방에서는 순종의 서거를 애도하는 망곡(望哭봉도식(奉悼式), 상인들의 철시와 봉도단(奉悼團), 학생들의 망곡과 동맹휴학 등 수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상인들의 다수가 철시하고, 상당수가 주체적으로 봉도단에 참여하여 상경했는데, 이는 비단 애도 활동을 넘은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순종 서거 후 학생들도 망곡을 하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순종의 서거를 애도하며 426일부터 5월 초순까지 많은 학교가 자체적으로 근신휴업이나 동맹휴학을 했는데, 관공립학교 중에도 학생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휴학을 한 학교가 많았다.

이러한 운동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주권을 잃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민족적 울분과 상실감, 망국의 설움이 담긴 주체적인 민족운동으로 평가한다. 당시 왕조 체제를 겪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청년, 학생 등 세대의 민족의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겠지만, 망국의 설움은 모두 같았다는 것이다. 당시 경찰 당국은 이러한 움직임을 최대한 통제하고 제한하려 했지만, 민심은 막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에서는 당시 지방에서의 이러한 움직임들에 대해 그들의 손에 미처 태극기와 격문만 쥐어져 있지 않았을 뿐, ‘6·10운동의 또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다고 평가한다.

 

4. 신주백 교수(전 연세대)“6·10만세운동에 대한 평가의 변화

 

본 논문은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에서의 6·10만세운동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정리한 글이다.

이 논문에서 남한의 6·10 만세운동 평가의 변화과정을 정리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해방 직후에는 박헌영의 성명서에 드러나듯 좌익 진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주도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이라는 인식과 동아일보 사설로 대표되는 학생 만세운동이라는 인식이 병존했다. 한국전쟁과 분단체제의 고착, 그리고 5·16군사쿠데타 이후 반공 민족주의가 확산하는 가운데 조선공산당의 주도성은 의식적으로 축소되었고, 사직동계·통동계 학생 그룹 중심의 만세운동이라는 서사로 평가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고,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실증적 연구와 재해석을 통해 6·10만세운동에서의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조직적 연계와 지도력이 복원되었고, 6·10만세운동이 통일전선운동이자 신간회로 이어지는 민족유일당운동의 기점이라는 평가가 학계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