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 3.1독립운동의 성지인 천안의 독립기념관 내 시어록비 공원에는 1940년 11월 당시 중국 중경의 국제방송을 통해 행한 백파(白波) 김학규(金學奎) 장군님의 방송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해방지상 국가독립지상의 이념으로 겨레의 힘을 하나로 모아 광복군을 조직하여 하나의 구령 아래 왜적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자”내용이 그것입니다.
오늘, 백파 김학규 장군님 47주기를 맞이하여 광복군 창설 직후의 대일항전 의지와 장군님의 기개와 호연지기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3.1독립운동이 나던 해에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신 장군님께서는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함께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한.중 합작의 항일 유격전을 벌이셨습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군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1933년 12월 여러 독립군 장성들과 함께 중국 본토로 이동하시어 민족혁명당과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셨으며,
1940월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장군님께서는 총사령부 참모로 임명되셨습니다.
같은 해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동하게 되자, 참모처장 겸 참모장이 되어 임무를 수행하셨으며,
이후 제3지대장 겸 징모 제6분처 주임위원이 되시어 적 치하에서 광복군의 공작거점을 확보, 적의 군사기밀을 탐지하는 한편, 중국 유격대와 함께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셨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특히 초모청년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현지 중국군과 교섭 끝에, 육군군관학교 간부 훈련반에 한광반을 특설케 하여 훈련주임으로서 정신훈련과 사상 선도를 담당하셨습니다. 조국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5월, 광복군 제2,3지대에 한미합동 OSS훈련 명령이 내려지고, 장군님 책임 하에 국내침투작전이 계획되었으나, 일제가 연합군 앞에 무조건적 항복함으로써 국내침공 작전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조국 광복 직후, 장군님께서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주 상해판사처 처장에 임명되어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 및 교포를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데 전력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장군님께서는 1948년 4월이나 되서야 그리운 고국 땅을 밟게 되셨습니다.
일제의 조기패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국내 환국에 불리하게 적용되어 민족 분단의 비극을 초래하였을 뿐 아니라, 장군님 개인의 삶에도 가혹한 시련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장군님의 생애는 우리민족의 비극적인 현대사와 더불어 결코 순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순탄치 못한 장군님의 생애가 저희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오늘, 서거 마흔 일곱 해를 맞이하여 김학규 장군님의 남다른 조국애와 민족애를 이어가며 나라를 더욱 발전시키고, 평화 통일을 이루기 위해 진력할 것을 저희 후손들은 다짐하오니